밀식으로 빽빽하게 심은 사과나무 사이에서 유독 한쪽 가지만 위로 삐죽하게 솟구쳐 자라거나, 가로등 밑에 있는 나무가 늦가을까지 단풍도 들지 않고 잎을 꽉 붙들고 있는 걸 보신 적 있으신가요?
단순히 ‘빛을 더 보려고 그런다’고 넘기기 쉽지만, 이 현상의 이면에는 ‘피토크롬(Phytochrome)’이라는 아주 신비로운 식물 내 광수용 단백질이 숨어 있습니다. 피토크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무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내 옆에 다른 경쟁자 나무가 바짝 붙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감각기관 역할을 합니다.
오늘은 이 피토크롬의 원리가 실제 과수 재배 현장과 전정(가지치기)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풀어보겠습니다.

피토크롬 요약
- 식물의 눈: 피토크롬은 빛의 파장(적색광/원적색광)을 감지해 주변 환경과 계절의 변화를 읽어내는 식물의 감각 센서입니다.
- 그늘 회피 반응: 나무를 너무 빽빽하게 심으면, 옆 나무 잎에서 반사된 빛을 감지하고 ‘경쟁’을 느끼며 위로만 길게 웃자랍니다(도장지 발생).
- 가로등 불빛의 함정: 밤에도 인공광을 계속 받으면 식물이 낮으로 착각해 가을이 와도 낙엽을 늦게 떨어뜨리며 휴면을 방해받습니다.
피토크롬이란 무엇인가: 붉은빛을 읽어내는 센서
피토크롬은 균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식물의 세포질에 존재하는 똑똑한 센서입니다. 이 피토크롬을 식물의 몸속에 있는 ‘출퇴근 스위치’라고 상상해 보세요.
식물은 눈이 없지만 이 스위치를 통해 두 가지 빛을 기가 막히게 구분합니다.
- 한낮의 쨍쨍한 햇빛(적색광)을 듬뿍 받으면: 스위치가 ‘딸깍’ 하고 켜짐(활성형, Pfr) 상태가 됩니다. 식물은 “해가 중천이네. 밥(광합성) 짓고 잎도 넓게 펴서 쑥쑥 크자!”라며 공장을 풀가동하는 ‘주간 근무 모드’에 들어갑니다.
- 해질녘 붉은 노을빛이나 짙은 그늘(원적색광)에 들어가면: 스위치가 다시 ‘딸깍’ 하고 꺼짐(비활성형, Pr) 상태로 돌아갑니다. “어두워졌거나 그늘에 가렸으니 무리하지 말고 쉬자”라며 에너지를 아끼는 ‘퇴근 휴식 모드’로 바뀌는 것이죠.
즉, 나무는 자기 몸속의 이 스위치가 켜져 있는지(대낮), 꺼져 있는지(밤이나 그늘)를 느끼면서 지금 싹을 틔울지, 꽃눈을 만들지, 아니면 가을을 맞아 낙엽을 떨어뜨릴지 생애 전반의 타이밍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 구분 | 꺼짐 스위치 (Pr형) | 켜짐 스위치 (Pfr형) |
| 어떤 빛을 받나? | 해질녘 노을이나 짙은 그늘 (원적색광) | 한낮의 쨍쨍한 직사광선 (적색광) |
| 식물의 상태 | 퇴근/휴식 모드 (비활성형) | 주간 근무 모드 (활성형) |
| 대표적인 반응 | 생장 억제, 신장(길이) 촉진 | 엽록소 합성, 잎 전개 촉진, 개화 조절 |

심화 내용: 교과서 속 ‘흡수 파장’의 함정
식물학 전문 서적을 보면 Pr형의 흡수 파장은 적색광, Pfr형은 원적색광이라고 반대로 적혀 있어 헷갈리기 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흡수 파장’은 그 상태를 유지하는 빛이 아니라, ‘반대 모드로 변신하기 위해 흡수하는 빛’을 뜻합니다.
즉, 꺼져있던 Pr이 낮의 적색광을 ‘흡수’하면 켜짐(Pfr)으로 변신하기 때문에, 대낮에는 결과적으로 Pfr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변신 스위치라고 이해하시면 헷갈리지 않습니다!
1959년 미국 농무부의 버틀러 연구진이 이 색소를 처음 분리해 냈습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피토크롬이 단순한 빛 감지 장치를 넘어 온도 변화까지 함께 감지하는 것으로 밝혀져, 식물이 싹을 틔우거나 꽃을 피울 시기를 결정하는 아주 똑똑한 종합 센서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왜 과수 재배자가 피토크롬을 알아야 할까? (그늘 회피 반응)
피토크롬은 줄기가 얼마나 길어질지, 꽃눈을 언제 틔울지 나무의 생애 전반을 지휘합니다. 이 원리를 알면 과수원에서 나무를 왜 ‘적당히 띄워 심어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과수원에 묘목을 빽빽하게 심어(밀식재배) 나무 사이 간격이 좁아지면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잎사귀는 태양광 중 적색광은 쏙 흡수하고, 원적색광은 거울처럼 튕겨냅니다. 즉, 옆 나무 잎에서 반사되어 내게 도달하는 빛은 ‘원적색광’이 잔뜩 묻어있는 빛입니다.
이때 내 나무의 피토크롬이 이 빛을 감지하면 “아! 내 옆에 경쟁자가 바짝 붙어있구나! 이대로 있다간 그늘에 먹히겠다!”라는 생존 신호로 받아들입니다. 그 결과, 나무는 옆으로 튼튼한 가지를 뻗어 꽃눈을 틔울 생각은 안 하고, 햇빛을 선점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뻗어 올라가기만 합니다. 이를 식물학에서는 ‘그늘 회피 반응(Shade Avoidance)’이라고 부릅니다.
실전기록: 밀식 재배가 부른 도장지 폭
몇 해 전, 밭의 공간을 조금이라도 아껴보겠다고 사과나무 묘목 구역을 권장 재식거리보다 훨씬 타이트하게, 거의 어깨가 닿을 정도로 빽빽하게 심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듬해 여름 나무들이 옆 나무와 그늘이 겹치기 시작하자, 약속이나 한 듯 옆으로 잔가지를 내는 대신 하늘을 향해 두꺼운 도장지(웃자란 가지)만 밀어 올리더군요. 바로 옆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적색광을 맞고 ‘경쟁 모드’가 켜져 버린 겁니다.
결국 그해 겨울과 이듬해 여름 내내, 톱과 전정가위를 들고 빽빽하게 얽힌 골격지를 솎아내고 억지로 나무 사이의 간격을 벌려주는 뼈아픈 재공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햇빛은 단순히 광합성을 위한 ‘에너지’일 뿐만 아니라, 식물에게 공간을 알려주는 ‘생존 신호’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가로등 옆 나무는 왜 늦게 낙엽이 질까?
이 피토크롬 센서는 일조 시간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해, 가을에 잎을 떨어뜨리고 겨울잠(휴면)에 들어갈 시기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밭 가장자리의 가로등이나 보안등 근처에 심긴 과수나무가 유독 가을 늦게까지 단풍도 안 들고 파란 잎을 달고 있는 걸 보셨을 겁니다. 밤이 되어 푹 쉬어야 할 시간에, 가로등 불빛(적색광 비율이 높은 인공광)이 계속 비추니 나무의 피토크롬이 “아직 낮이 길구나, 가을이 오려면 멀었네” 하고 착각하여 활성형(Pfr)으로 계속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겨울잠을 푹 자야 이듬해 봄에 튼실한 꽃눈을 밀어내는데, 인공조명 때문에 수면 장애를 겪고 있는 셈이죠.
글을 마치며: 전정과 재식거리의 과학적 근거
피토크롬 원리를 이해하면 전정(가지치기)과 재식거리를 설계할 때 아주 명확한 기준이 생깁니다.
단순히 ‘햇빛을 많이 쬐어주자’는 감각적인 판단을 넘어서, “나무 안쪽 깊숙한 곳까지 적색광이 들어가 피토크롬이 안심하게 만들어야 도장지가 덜 생기고 꽃눈이 잘 생긴다”는 과학적 근거를 갖게 됩니다.
여름철에 복잡한 가지를 솎아내는 여름 전정이 왜 중요한지, 왜 품종에 맞는 넉넉한 밭 공간을 내어주어야 하는지 설명해 주는 가장 완벽한 해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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